다시 생각해 보는 행복론
다시 생각해 보는 행복론
인간은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나 행복해지고 싶어 한다.
고대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도 행복은 현세의 궁극적인 목표였지만
기독교와 카톨릭은 현세보다 천국에서의 행복을 더 중요시하기 때문에 사랑과 절제, 그리고 금욕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행복해질 권리는 있지만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아니, 남이 볼 때는 충분히 행복한 상태에 있지만 본인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기도 하는 걸 보면
역시 행복은 상대적이고 자기만족에 의한 것 같다.
또한 행복은 주관적이어서 인간의 욕망과 비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인간은 규범과 법과 도덕을 내세우는 질서가 존재하기에 행복의 가치도 주관적이지만 보편적인 가치를 가져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만 행복할 수 있을까?
요한 볼프강 괴테(Johann Wolfgang Goethe)는 행복의 필수 조건으로 건강, 인내. 희망, 자비심, 경제적 여유를 뽑았다.
그런데 인간의 절대 명제인 "행복"이란 도대체 뭘 의미하는 걸까?
행복은 불행한 사고와 질병이 없고 즐겁고 평안한 상태로 오랜 기간 지속되는 것을 말한다.
행복을 기쁨과 동일시 하기도 하지만 인간은 항상 기쁠 수만은 없다는 게 한계인 것 같다,
기쁨에 의한 행복감은 이내 더 큰 욕망 속에 고개를 숙이고 자취를 감추기 때문이다.
욕망이 크면 클수록 행복은 자꾸만 멀어져 가기 때문이다.
그 절정의 기쁨과 즐거움에 의한 행복감을 쟁취하기 위해 우린 또다시 인내와 고통을 맛보면서 노력하여야만 한다.
그래서 인간실격으로 유명한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라는 일본의 유명한 작가는
"행복이란 비애의 강물바닥에 가라앉아 흐릿하게 빛나는 사금파리"와 같은 것이라고 정의한다.
행복을 기쁨과는 다르게 정의하기도 한다.
기쁨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행복은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기쁨이 행복의 필수 조건인 것만은 사실이다.
사람들은 보통 기쁨을 행복한 상태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인간도 역시 동물이라면서 약육강식에 의한 정글의 법칙을 내세우며 자신의 행복과 만족을 위하여
다수의 타인을 희생시키고 불행에 몰아 넣기도 한다.
그러나 각종 범죄와 악행을 저지르고 자신만의 쾌락을 행복이라고 생각하여 중시한다면 그는 사회적인 제재를 받아서
불행에 빠지게 될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범죄자, 특히 사이코패스와 독재자들과 사이비종교 지도자들이다.
독재자와 그 추종자의 욕망과 사이비 종교의 교주의 허황된 망상과 욕망이 인간의 행복을 빼앗기도 한다.
북한의 김씨 일족 같은 독재자 때문에 오늘날까지 기아와 억압에 다수의 북한 동포들이 신음하고 있다.
아프리카의 기아와 질병도 역시 대부분이 독재자에 의한 수탈 때문이다.
천국이라 명해진 내세의 행복이라는 명목 하에 다수의 신도를 불행에 몰아넣고 호화 호식하는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도 역시 마찬가지다.
수천 년간 보이지 않고 응답 없는 하늘과 영계를 팔아서 치부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워 넣는 종교가의 예는 주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숱한 인명을 앗아간 세월호의 교단인 구원파의 유병언도 끝없는 탐욕을 부리다가 결국은 비참한 객사를 하고 말았다.
자칭교주라는 이들과 무속인들의 거짓말과 영생과 종말론 그리고 예수 재림을 내세우는 허무맹랑한 교리에
그 신도들은 속고 희생당하고 약탈당하면서도 행복하다고 믿고 있는다.
어떤 이들은 행복을 찾아 노력하고 어떤 이들은 손쉽게 행복감에 젖으려고 범죄와 약물 중독에 빠져 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손쉽게 얻은 행복감은 이내 비참한 모습으로 육신과 정신을 망가지게 하여 더한 나락으로 빠진다. 얼마전 일본열도를 떠들썩하게 했던 유명 가수의 마약목용사건도 그런 일례를 보여준다. 한국인에게도 잘 알려진 SAY YES, YAH YAH YAH를 부른 CHAGE & ASKA의 멤버 아스카의 약물 중독도 최고의 자리에서 떨어져 좌절감과 상실감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행복의 가치는 상대적인 것일 수도 있어서 그리 불행치 않은 사람들도 상대적인 빈곤감으로 불행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과다한 자만심의 표출과 자랑은 타인을 불행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
역사 드라마를 보노라면 당시의 백성들의 궁핍과 차별과 학대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하다.
어떻게 저렇게 비참한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절대 권력 하에 차별받고 굶주리고 억압받으며 살았다.
우리나라도 왕조시대의 많은 이들이 종이란 또 다른 이름으로 노예의 삶을 살아 왔다.
생은 모진 것이라서 그들은 죽지 못해 살아왔는데 그들 역시 같은 피부와 같은 민족이었다는 것이다.
그들을 학대하고 착취하면서 부유한 삶을 누려왔던 지배자들과 양반들도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오늘날 인권 민본적인 시각을 가지고 보면 그들은 착취자에 불과한 악인들이었다.
그처럼 수탈당하면서 살아온 사람들에 비하면 현대인들은 역사 이래 가장 부유하고 자유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현대인 역시 상대적인 박탈감에 절망에 빠지고 불행을 느끼기도 한다.
이렇듯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 경제대국 일본도 후쿠시마 원발사건 이후 국민의 행복지수와 삶의 만족도는 상당히 낮다고 한다.
물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물질의 많고 적음이 행복과 꼭 정비례하지는 않는 것 같지만 내 생각으로는 그래도
행복해지려면 물질의 풍요로움이 전제되어야만 한다고 본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부를 행복의 중요한 요소로 본다.
돈으로 뭐든지 산다는 세상이지만, 행복도 살 수 있을까? 정말 그럴까?
그러면 부자들은 당연히 행복해야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계속된 궁핍은 불행을 가져다줄 확률만은 대단히 많은 것 같다.
그런 면에서 돈이 있으면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걱정없이 살고 , 좋아하는 취미도 맘껏 즐기고
원하는 것들도 쉽게 가질 수 있어 행복해질 수있다.
또한 기부를 하여 가난한 자를 도우면서 만족감과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겉으로는 행복하고 부러울 게 없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걱정거리가 있다.
예로부터 천석지기는 천석만큼, 만석지기는 만석만큼 걱정거리를 안고 산다고 한다.
가난한 자들도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가득하여 선행을 베풀고 봉사활동을 함으로서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또한 낙천적이고 욕심이 작은 사람들은 손쉽게 행복을 찾기도 한다.
작고 소소한 일에 감사하고 만족하다 보면 매사에 기뻐할 일이 늘어나고 행복감은 충만해지기도 한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선천적으로 타고 나오는 성격에서 기인한다고도 한다.
언제까지나 평화가 지속되고 늘 행복하면 얼마나 좋을까...
.....
.
.
.
.
.
.
.
어떠신지요?
당신은 지금 행복하신가요?
행복하지 않다고요?
그러면 취미 생활, 금연, 금주, 그리고 운동을 해보는 건 어떻실는지요.
아! 또 하나 중요한 게 있네요~ 안정된 결혼 생활과 가족 간의 화목은 행복의 필수 조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