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 묘소
이순신 장군 묘소
아산시 음봉면에 소재,
이순신 장군은 전사 후 마지막 통제영이었던 고금도에 모셔졌다가,
전사 16년 뒤인 1614년(광해 6년)에 지금의 어라산에 이장되었다.
묘소는 부인 상주방씨와 합장묘로서 1970년대 성역화사업 당시 왕릉과 같이 곡장이 둘러졌다.
신도비 2기가 있는데,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이 죽었을 때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그의 사적(事蹟), 즉 생애를 새겨 넣은 비로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에 한하여 세워졌다.
봉분 동남쪽 아래에 있는 신도비는 정조가 친히 글을 내려서 만든 것이다.
정조는 ........
"우리 장하신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를 세우심에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 한 분의 힘 바로 그것에 의함이라
이제 충무공에게 특별히 비명을 짓지 아니하고 누구 비명을 쓴다 하랴" 라고 비문을 내렸다 한다.
장군의 묘소
장군은 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민족의 영웅으로
옥포대첩, 사천포해전, 당포해전, 1차 당항포해전, 안골포해전, 부산포해전, 명량대첩, 노량해전 등에서 승리했다.
패전을 모르고 전승을 기록한 분이었다.
서울 건천동(乾川洞, 현재 인현동에서 태어났다.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격파하였다(사천포해전).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파하였다.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였다.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 등이 이끄는 일본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7년(선조 30) 일본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잡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이를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공은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지 않았다.
이로 인하여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고, 두 번째로 백의종군하였다.
이에 수군통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겨우 13척밖에 안 남은 함선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영화로 나왔던 명량대첩이다.
1598년(선조 31) 2월 철수를 하려고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을 쳐부수려고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묘소의 가을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