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곳은 속리산인터체인지에서 나와 차로 이십여분을 더 달려가야 되는 산간 오지다.
마을 아래에는 고속도로 속리산 휴게소가 바로 내려다 보이고
한국의 100대 명산 중 하나인 구병산의 병풍처럼 둘러싸인 모습이 훤히 마주 보이는 곳이다.
마을 이름은 임곡리라고 하지만 근방 사람들은 임실이라고도 부른다.
산간 고원지대라서 겨울엔 추위가 심하지만 여름엔 그만큼 서늘한 곳이기도 하다. 더 갈 수 없어 막다른 마을, 온통 산에 둘러싸여 있는 이곳은 동학의 후예인 강 씨와 장 씨의 집성촌이기도 하다.
이곳은 예로부터 십승지(十勝地) 중 한 곳이라도 한다. 십승지란 천지 대개벽이 일어날 때 재앙을 피하기에 좋은 10군데의 지역을 말한다. 정감록이나 격암유록에 따르면 가까운 미래에 엄청난 천재지변이 일어나 인간은 끔찍한 질병과 기아, 혹한과 공포에 시달리게 되어 인류는 절멸의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십승지에 들어가는 사람은 재앙으로부터 피하여 안락한 생활을 누릴 수 있으며 자손이 끊기지 않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
<보은 속리 난증항 일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과 경북 상주군 화북면 화남 일대>
동네가 실개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충북과 경북으로 갈려져 있는 이곳은 말투마저 경상도 사투리와 충청도 사투리로 갈라진다.
이곳은 내가 태어난 곳이지만 두세 살 경에 근처 큰 동네로 이사를 가서
낯선 동네이기도 하다.
내가 자란 동네도 중학을 졸업하고는 자주 가지 않아서 아는 사람도 많지 않은데 이 동네는 떠난 지 워낙 오래되어서 친척들조차도 희미하게 얼굴만 생각날 정도이다.
이곳에서의 추억이란 게 그리 많지는 않다. 어릴 적 기억이 별로 남아 있지 않지만 몇 가지 기억이 난다. 소 등위에 올라타고 장터로 이사를 갔던 기억만큼은 남아 있다. 오솔길을 따라 소 몇 마리 등에 이삿짐을 챙긴 긴 행열이 아스라이 생각난다. 소쩍새가 이슬 맺힌 나뭇잎 사이로 호기심에 긴 행열을 바라보던 그날은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손위 누이가 좋아라 하던 날이었다.
매일 어린 꼬마가 책보를 허리에 둘러매고 마당바위와 서당골 입구를 지나서 장터에 있는 초등학교까지 한두 시간 걸어서 다녔던 길이 고달팠을 것이다.
아마도 이곳에서 큰 장터로 이사를 가게 된 것은 자식들의 학교문제도 있었고, 모친의 활달한 성격에 장사도하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이곳을 떠난 후에도 조부께서 작은아버지와 이곳에 남아 있어서 방학이면 놀러 갔다.
여름 방학에 오솔길을 따라 냇가에 이르면 징검다리가 있고 그곳에서 물장난을 하다가 아직도 익지
않은 시퍼런 호두를 따서 여린 알맹이를 먹기도 했다. 계곡에는 늘 맑은 물이 졸졸 흘러서 여름이면 멱을
감던 곳이지만 친척들도, 작은 집도 도회지로 이사 가고 난 다음엔 이곳과는 인연이 끊어졌다.
산골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이곳 사람들도 착하고 순박하고 인정이 많다. 어느 나라 사람들이나 산골 사람들은 인정이 많고 사람을 그리워한다. 내가 사는 일본 역시 산골 사람들은 너무 정이 있다. 예전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보낼 때 오스트리아에 자주 여행을 간 적이 있다. 비인이나 잘츠부르크 같은 관광도시는 어느 나라 도시와 별 다른 게 없지만 티롤지방의 산골로 들어가면 사람들이 그렇게 인정 많고순박할 수가 없었다. 그때 생각하기로는 이런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천국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산골 사람들은 많이 가지고, 많이 배우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준다.
그 후 몇십 년이 흘러 2003년도부터 선친께서 작고하신 후에야 들리게 된 곳이다. 모친께서 선친이 작고하신 이후에 이곳에 넓은 땅을 사서 선조들 묘소도 이장하고 비석도 세우고, 여러모로 애착을 가져서 많이 투자를 하고 손을 본 곳이다.
그리고 이 땅에 모친이 이곳에 유실수를 심은 것도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식들이 나중에 나무가 크고 과일이 열리면 자주 들릴 것이라는 생각이고 그 참에 조상들의 산소도 들려볼 것이라는 깊은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성가신 잡초 제거에다가 퇴비를 주는 것과 벌초는 고스란히 장남인 내 몫으로 떨어졌다. 뙤약볕이 내려쬐는 무더운 한여름에 예초기를 돌리는 것은 고역이고 보통 짜증 나는 일이 아니지만 조금씩 관리를 하다 보니 나름대로 노하우도 생기고 노후의 재미로 삼아도 될 것 같다.
작년까지는 제초제를 해 보았지만 그리 큰 효과가 없어서 올해 부분적으로 부직포를 깔아 놓았다. 올해부터는 부직포 깔은 만큼은 손이 덜 갈 것 같아 제초제를 뿌리지 않고 나무 둘레만 잡초를 제거해 줘도 좋을 듯하다.
모든 게 생각하기 나름이다. 과수원 한구석에 이삼십 평 억새가 춤추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일부러 가을 억새를 보러 명성산이나 화왕산, 정선의 민둥산까지 찾아가지 않았던가... 억새 옆에는 작은 클로버 군락도 있는데 클로버는 옆으로 퍼지는 성질이 있어서 그냥 놔두면 키 큰 잡초방지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과수원이라고 칭하기는 아직 부족한 이곳에 3~4년 전에 감나무와 대추나무 몇백 그루를 심었는데 작년 겨울 혹독한 한파에 많이 죽었다. 나무는 관리가 중요한데 일 년에 잡초 제거만 몇 번 해주고 퇴비도 거의 안 주니 잘 자랄 리가 없다. 그 옆 밭에는 다 자란 복숭아나무, 살구나무에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린다. 사과나 복숭아, 배 같은 과일은 퇴비를 많이 줘야 하고약도 많이 쳐야 먹을만하다고 한다.
하지만 살구나무에선 입에 군침이 돌만큼 빨간 살구가 익어간다. 작은 집 옆집에 큰 살구나무가 있었다. 여름이면 잘 익은 살구가 이쪽 마당으로도 떨어져 주워 먹었던 적이 있다. 살구에 대한 내 추억의 전부가 아쉽게도 이것뿐이다.
오래된 호두나무와 밤나무에서는 지금도 가을에 탐스러운 호두와 밤이 열린다. 앞으로는 호두나무를 50그루 정도 더 심고 잣나무나 조경수도 심어 볼 예정이다.
할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집터엔 은행나무 두 그루, 버드나무도 있다. 그리고 50년이 족히 넘을듯한 큰 감나무 세 그루에선 감을 따기가 힘들어 까치밥으로 놓아두고 있다.
작년 가을엔 작은 단풍나무를 심었다. 올해 봄에 가보니 싹을 내고 살아 있지 않은가.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어린 단풍나무가 기특하고 반가웠다. 올해도 집터 주위에는 이런저런 나무를 심어 보고 싶다. 나무 키우기는 처음 몇 년이 고생이지만 나무뿌리가 자리 잡고 커 나가면 주위에 잡초도 덜 자라고 손이 덜 간다. 물론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거라면 사시사철 바쁜 나날을 보내야겠지만, 내 경우는 취미로 하는 것이라서 대충 흉내만 내본다..
지금은 약간 고생이 되지만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익어가는 과일들을 바라보는 풍성한 생활을 기대할 수도 있을 게다. 밭에는 야채도 심고 고구마도 심고 콩도 심어서 단풍 드는 아름다운 가을에 친구들 불러 모아 이곳에서 가을 잔치를 하고 싶다.
이곳에 들렸던 친구들도 아름다운 곳이라고 감탄을 한다. 과찬이겠지만 청정한 자그마한 마을에 꾀꼬리소리가 들려오고 풍광 또한 좋으니 나름대로 괜찮은 곳이다.
이 작은 마을이 맘에 든다는 좋은 친구들이 있다면 모여서 노후에 같이 소일하면서 지내고 싶다. 맘이 맞는 대여섯 가족이 모여 살면서 서로 돕고, 서로 마음 주면서 외롭지 않게 살아가고픈 곳이다. 그저 소박하게 즐거운 일 있으면 같이 웃고 슬픈 일 있으면 같이 슬퍼하면서 사는 아름다운 마을을 만들어 보고 싶기도 하다.
나와는 인연이 다했던 것 같았던 이곳..... 아무래도 깊은 인연이 맺어져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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