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Photo of KOREA/내 고향

관기,송현,구병산의 여름 풍경

世輝 2012. 8. 21. 17:16

2012  8월 

관기,송현,구병산의 여름 풍경

 

 

 

 

 

서기 1361에 두 번째 혼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왕은 그해 11월 18일

서울인 개경을 버리고

경상도 복주(福州-오늘의 안동)로 피난하였다.

 

이듬해 정세운(鄭世雲), 이방실(李芳實)등의 분전으로 홍건적을 괴멸시키고

개경을 도로 찾았으나

김용(金鎔)이란 자가 정세운의 전공을 시기하여 정세운 등을

차례로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왕은 안동에서 상주로 상주에서 청주로 전전하면서 환도의 시기를 기다릴 때,

 상주에서 청주로 가는 길에 보은군 마로면 관기리에서 약 3개월을 묵고 간 사실이 있다.

 

현재 마로면 송현리 건너편 동쪽의 산고개를 "왕래재(王來재)"라 부르는데

공민왕이 상주에서 이 고개를 넘어 관기에 오셨다 하여 이렇게 부른다 한다.

 

왕은 이곳에 머물면서 앞산에 곡식을 저장할 창고도 짓고 성도 쌓도록 하였으며

다스릴 감독도 만들도록 하였다고 한다.

현재 "원앙골"이 사창(社倉)이 있었던 곳이며 "옥갈머리"는

바로 옥이 있던 곳이라 하여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현재 마로면 소재지를 관기(官基)라 하는 것은 관기(館基)라

부르도록 한 것이 변한 것이라 한다.

공민왕은 관기를 떠나 청주로 가던 중 삼승면 원남에서 비를 만나 여기서

하루를 머물고 갔다.

 

 

그때 왕을 따르던 염제신(廉梯臣), 이암(李岩)등

일곱 원로대신들이 모여 앉아 웃고 이야기하며 시를 짓고 놀적에

대장군 김하적(金何赤)은 피리를 불고 장군 김사혁(金斯革)은 비파를 타고

대산 황석기(黃石寄)가 부르는 시에 모두 따라 화답시를 지었다고 한다.



이곳에 황석기 지은 시를 소개한다.

 


"푸른 옥잔은 깊고 술맛은 아름답구나.

 

거문고 소리는 느린데 피리소리 길다.

 

그중에 가느다란 노래소리 들리니

 

일곱 늙은이 서로 즐기는데 수염은 서리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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