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ory&Photo of KOREA/내 고향

고향의 숨결

世輝 2009. 5. 21. 13:57

 

 

 

 

 

 

 

 

 

 

 

 

 

 

 

 

 

 

 

 

 

 

 

 

 

 

 

 

 

 

 

 

 

 

 

 

 

 

 

 

 

 

 

 

 

 

 

 

 

 

 

 

 

 

 

 

 

 

면적 2.3km2인 관기리는 마로면의 서쪽에 있는 면소재지다. 예로부터 능성구씨(凌城具氏)집성촌으로 마을 뒷산에는 수백마리의 백노가 살았다고 한다.

 

 자연마을로는 왕래원이 있어 관기라 불려진 관터(관기초교 서쪽에 위치하며 현재의 관기 3리), 관터 남쪽에 있는 마을로 사여리의 마을 중 위에 있다하여 불린 웃사여(관기 2리), 관기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선비들이 살았다하여 사여(士餘)라 불리게된 아랫사여(관기 2리), 관기초등학교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큰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불린 골안(관기 1리)이 있다.

 

웃사여 서북쪽에는 고봉들이라고 불리는 들판이 있다. 그 고봉들 가운데 외따로 떨어져 뾰족이 얼굴을 쳐들고 있는 산이 있는데 옛날 천지 개벽당시 시루봉 상봉이 떠내려와 외롭게 정착되었다고 해서 고봉이라 불리는 산이다. 그 고봉아래 펼쳐진 고봉들에는 관기리가 자랑하는 고봉정사가 있다.

 

 

1980년 1월 14일 충북지방기념물 제 51호로 지정된 고봉정사는 관기리 458-1번지에 위치해 있다. 세종대부터 왕조가 안정되어 학문을 장려하고 다시 성중대에 이르러 문운(文運)이 크게 일어나는 사회 분위기에 따라 지방에 은거하였던 유자(儒者)들이 차츰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조짐을 보이던 조선 중기에 충암(沖庵) 김정(金淨)이 학문을 연마하면서 삼파연류봉(三派連溜峯)을 고봉(孤峯)이라 하고 올라가 완상(玩賞)하며 스스로 자신의 호(號)로 삼았던 곳에 원정(猿停) 최수성이 고봉정을 건립하고 음영 하였다. 그러던 중 드디어 훈신세력의 구화(溝禍)에 의해 사림세력이 큰 화를 당하는 이른바 기묘사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1519년 (중종 14) 기묘사화 후 사직되어 이곳으로 은거한 병암 구수복이 이어 받았다. 고봉정사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다시 세력을 키우던 구수복은 1533년 이준경과 동생 수담의 노력으로 구례현감으로 복직된 후 일생을 마쳤다. 후에 정자가 퇴락 하여 구수복의 5세손 일봉 이천이 봉 아래로 옮겨 지을 때 지금의 건물로 세웠다한다.

 

건물은 2단으로 쌓은 석축을 기단으로 하고 그 위에 정방형에 가까운 모양의 덤벙주춧돌을 놓고 민흘림으로 된 둥근 기둥을 앞면 3칸, 옆면 2칸 규모로 지었다. 공포는 익공식, 처마는 겹처마, 지붕은 팔각이다. 평면의 구성은 오른쪽에 온돌방, 왼쪽에 우물마루 방과 마루사이에 기둥을 둔 형식이다. 건물 바깥쪽은 온돌방에 쌓여 닫이문을 닫고 마루에는 앞쪽에 분합문을 옆면과 뒷면에 각각 쌍여닫이문을 달았다.

 

1981년 정사를 해체 보수하고 고봉사, 관리사, 창고 삼문 등 담장을 새로 지었다. 정사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며 고봉사의 현판은 전 대통령 최규하의 휘호이며 사우애는 최수성, 김정, 구수복 3인을 봉안하고 춘추로 제향하고 있다.


 

 

 

보은에서 상주를 향해 가다가 관기에서 오른쪽(남쪽)으로 꺾어 금계천을 따라 2,5km2 가면, 보은에서 남동으로 흘러 내려온 보청천과 합류하는 곳, 바로 동쪽산에 있는 산성인 관기 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상주행로와 청산행로를 막는 한편, 금계천을 받은 보청천을 통해 옥천의 산계리토성과 통하게 되는 지리적 이점을 지니고 있었다. 성의 둘레는 458.5m 이고, 성안에서 신라계의 경질토기편과 통일신라에서 고려시대에 이르는 토기조각과 기와조각이 많이 발견되어, 삼국시대에 신라가 쌓은 산성임을 알 수 있다.

 

 

관기 3리 남쪽으로 놓여진 다리를 건너가면 자연마을인 사여리가 보인다. 사여 서쪽 300m 지점에 있는 바손바우가 있다. 정월 대보름날 마을 사람들이 이 바위에 와서 소원을 빌었다고 하는 영험한 바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