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오르는 길에 땀이 날 정도로 포근한 걸 보니 과연 봄날씨다.
화창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런대로 날씨가 좋은 날 오후에 오른 관악산,
거북바위를 경유하여 마당바위까지 갔다가 낙성대로 하산을 하다가 잠시 쉰 팔각정.
차 한 잔 마시고 내려가려고 하다가 언뜻 연분홍빛 진달래가 눈에 띈다.
그 반가움에 디카를 들이대고 화사함을 담았다.
마치 흑백 사진 같이 황량하기만 하던 산속에 연분홍 꽃이 수줍은 듯이 피어 있는 모습은
이맘때에나 느낄 수 있는, 작은 감동으로 다가오는 색감이다.
진달래는 어렸을 때 참꽃이라고도 불렀는데 철쭉보다는 꽃잎이 연하고 부드러워서
꽃잎을 먹을 수 있지만 철쭉은 독성이 있어서 먹을 수 없다고 한다.
작고 부드러운 꽃 잎 때문에 더욱 사랑스러운 꽃이 진달래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김소월의 시,
"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한때 청춘시절의 아픔으로 절실하게 다가온 소월의 시였다.
그의 슬프고 서정적인 시는 다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지금 소월의 시를 읽어보면 왜 그리 감동했는지 이해가 안 가지만 당시 그나마 내 마음을 달래주던 게 그의 시였다.
봄이 되면 개나리와 더불어 흔하게 피어있는 꽃이 진달래다.
김소월이 이야기하던 영변에는 가본 적이 없어 잘 모르지만 강화의 고려산에는 작은 산 전체가
진달래로 덮여 있어 봄이 되면 행락객들로 붐빈다.
고려산 정도는 아니지만 온통 진달래 천지였던 동네 뒷산을 돌아다니며 꽃잎을 따 먹던 추억의 꽃이 진달래다.
지난날은 늘 각색되어 아름답게 기억된다고 하지만 그때의 천진난만했던 동심은 진달래만큼이나 순수하고 아름다웠다.
아름드리 진달래 꽃을 꺾어 가슴에 안고 다니며 이산 저산을 헤매다니다가 배가 고파지면
진달래 꽃을 입에 가득 넣어 먹기도 하고 허공에 뿌리며 웃던 그 시절이 꿈같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그때 진달래를 같이 꺾고 버들피리 만들어 함께 놀던 친구들 모습도 그립기만 하다.
그러다가 낯선 어른을 만나면 소스라치게 놀라 도망 다니던 기억도 떠오른다.
어린아이의 간을 빼먹으면 병이 낫는다고 한 문둥이가 아닐까 해서 친구들과 도망 다녔던 것이다.
지금은 벌써 오래 전에 없어졌지만 당시만 해도 문둥이들이 가끔씩 돌아다니곤 해서 겁이 났었다.
진달래꽃을 꺾으러 산으로 온 아이들의 간을 빼먹는다는 얼토당토않은 유어비어를
그대로 믿던 순박한 무지와 편견 속에 한센병환자들은 얼마나 많은 차별에 고통받았을까?
몇년 전 고향에 들렀다가 다시 올라간 그 산에는 나무가 무성해서 오르는 길조차 없어졌지만
내 마음 속에는 진한 봄향기의 추억이 진달래와 함께 단편적으로 늘 살아 숨 쉬고 있다.
그러한 초딩 시절까지의 추억은 늘 순간적인 기억만으로 남아 있어 연결되지 않는다.
뒷산으로 오르는 길목에 피어 있던 찔레꽃,
한바탕 바람이 불어오면 우수수 떨어지던 감꽃,
향긋한 냄새를 풍기던 살구 내음,
어스름이 깔리면 초가집에 피어오르던 연기.
마당에 떨어진 새벽 이슬에 젖은 홍시,
박완서 같이 기억이 좋은 소설가가 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따먹었을까"를 읽다 보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너무도 세세히 기억하고 있어 아름답게 묘사해 놓고 있지만 상당히 상상이 가미된 게 아닐까 싶기도하다.
소설처럼 아름다운 추억 하나를 간직하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아무리 지난 기억을 곱씹어 보아도 내게는 황순원의 "소나기"에 등장하는 것 같은 소녀들과의 추억이 없다.
내성적이고 유독 부끄러움을 많이 탔던 성격 탓도 있겠지만 당시만 해도 여자 아이들과 같이
이야기 한번 하는 것도 놀림감이 되어서 가까이해 본 기억이 없다.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처럼 아름다운 첫사랑에 대한 기억도 없지만 천지난만하기만 했던 그 시절의
추억은 아름다웠다.
중학시절엔 여자아이들과 이야기하는 것도 금기였기에 같이 논다는 것은 퇴학감이었다.
혹자는 암흑 같은 시절이라고 할진 몰라도 이성에겐 전혀 관심이 없던 내겐 풍요롭기만 한 시절이었다.
이제 봄이 되니 산행의 테마는 진달래가 될 것이다.
차를 타고 멀리 가지 않아도 가까운 북한산 진달래 능선이나 지장능선에도 진달래가 많이 핀다.
관악산에도 작은 진달래 능선이 있지만 청계산에도 진달래가 아름답게 피어 등산객들의 환영을 받을 것이다.
꽃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마음은 누구나 다 똑같은 가 보다.
젊은 시절에는 관심이 없다가 나이 들어서 꽃이 예쁘게 보인다.
어디 꽃만이랴.
산과 들 그리고 강과 바다, 섬 등등 자연이 너무 좋게만 느껴진다.
일본에서 여길 저기 여행하면서 보아도 진달래와 똑같은 꽃은 없었다.
철쭉과 비슷한 꽃은 많아도 한국 고유의 진달래와 똑같은 꽃은 보질 못했다.
일본에서 철쭉이라도 보면서 아이들에게 진달래를 이야기하며 내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전해 보지만
일본의 도심에서 자란 아이들에겐 그저 호랑이가 담배 피우던 시절의 이야기로 밖에 안 들리나 보다.
아이들에게 시골의 전원 풍경이 물씬 풍겨 나오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없다는 게
안타깝지만 그 아이들에게는 나름대로 게임과 디지털 문화의 추억이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올해는 동경의 벚꽃도 늦게 핀다고 하지만 가족과 함께 꽃구경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일이 안 끝나서 동경으로 가지 못하고 있으니.....
아직 벚꽃은 다 안 피었지만 능수벚꽃이 화려한 자태로 뽐내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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