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장례문화

世輝 2005. 6. 2. 18:21

장례문화

 

언젠가 본 일본 티브이 드라마 중에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있다.

결혼도 안한 처녀가 사고로 죽어서 지상세계를 내려다보니 자기의 장례식의

문상객이 별로 없어서 충격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생전에 남에게 피해도 끼치지 않고 그렇다고 도움도 받지 않은 채

깔끔하게 살아온 그녀이지만 자기를 기억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대해 충격을 받았다는 내용이다.

 

그동안 스쳐 지나간 인연들은 자기의 죽음과 무관하게 웃으면서 살아가고

자기의 죽음에 대해 슬퍼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에 대해 놀랐던 것이다.

그녀는 죽음의 문턱에서 자기의 미래를 엿보다가 다시 살아난 후에 인간관계를 중시한 따뜻한 삶을 살았다는 이야기다.

 

자기가 죽어서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고 많은 이들이 장례식에 참석해서

자기의 죽음을 기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간관계를 맺어간다는 스토리다.

 

벌써 십몇년 전부터 일본에는 대리가족이라는 것이 있어서 외로운 노인들의 아들 손자 노릇을 대신하고

돈을 받는 신종 직업도 생겨났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는데 어느새 한국에도 결혼식장에 손님과 친구들

노릇을 해주고 돈을 받는 신종 아르바이트가 생겨났다고 한다.

 

물론 장례식장에서도 문상객처럼 해주는 신종 아르바이트가 생겨났다고 한다. 너무도 썰렁한 식장을 의식한

주최 측의 궁여지책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남의눈을 의식하여 살아가고 있다.

 

남보다 잘살아야겠다는 경쟁심리와 더불어 두고두고 나를 기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게 몇 년이나 지속이 될 것인가. 벌써 2代만 지나도 친혈육조차 기억하지 못하는걸.

 

사실 그렇다.

자연이란 것은 순환을 거듭하고 있고 인간의 인생이라는 것은 물과 같이 흐르는 것이다.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는 것이고 인간에게 있어 죽음의 세계는 늘 경외의 , 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그래서 철학이라는 것도 생겨났고 종교라는 것도 생겨난 것이다.

 

가끔씩 죽음에 관해 생각해 볼 때가 있다. 이렇게도 생생하게 느껴지는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사라져 가고

내 영혼이라는 것도 소멸되어진다고 하면 두렵기까지 하다.

 

그래서 나는 영혼이 계속 존재하여 영계라는 곳에서 지낼 수 있길 바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느 누가 죽음에 대해 딱 부러지게 결론지어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 누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할지언정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 것인가.

 

한국의 유교식 장례문화는 일대 변환기에 서 있다.

산에 매장하는 습관을 탈피해 화장을 선호하여 납골당에 모시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났다.

 

이웃나라 일본의 장례식장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면 대개가 절에서 하고 스님이 염불을 해준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가까운 친지가 화장터로 따라가서 마지막 고별인사를 한다.

말이 화장터이지 깨끗한 호텔을 연상할 정도로 잘해 놓았고 주택가 옆에 위치해 있다.

 

장례식도 시간을 정하여 서너 시간 안에 끝내고 만다. 복장도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고 여성들도

검은 양장차림인 것은 상식이다. 우리네처럼 상복을 입고 밤새도록 아이고 아이고 하며 곡을 하고 우는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슬픔을 참는 것이다. 그렇지만 화장하러 뜨거운 불속으로 관이 들어가는 순간 눈물바다가 되어버린다.

그것은 슬픔에 찬 진정한 오열이었다.

 

나는 사람을 태워서 뼈만 주워 담아 모신다는 화장이 싫다. 아마도 내가 고루하고 보수적인 사람이라서 그럴 것이다.

불에 태우느냐, 아니면 벌레나 미생물에 갉아 먹혀서 썩을 것이냐는 여전히 난제로 남아 있지만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는 것은 지옥으로 향하는 것 같기도 하여 싫은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고인에게 잘 썩는다는 수의를 입히는 게 전통이 되었지만 요즘에는 자기가 아끼던 옷을

입고 가시겠다는 분도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옷이야 언젠가 썩어버리는 것 아닌가.

 

그러나 형식이야 어떻든 간에 우리의 존재는 없어지고 사람들의 뇌리 속에서 서서히 사라져 가 버린다.

슬픔에 젖어 있는 상가에서 왁자지껄 웃으며 활개 치는 문상객에게는 벌써 고인에 대한 슬픔보다

살아있는 자의 포식과 여유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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