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추
지난겨울 아내가 집 옆에 있는 하나로마트에서 파란 고추를 사 왔다.
매운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곳에서 가장 좋은것을 골라서 사 왔으니 먹어 보라는 것이었다.
먹었는데 왠걸, 대단히 매웠다. 다른 걸 먹어 보았는데 그것 역시 매운 것이었다.
그래서 포장을 가져오라고 해서 보았더니 [청양고추]라고 쓰여있는 것이 아닌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당신도 먹어 보라고 주었더니 그때서야 먹어보곤 매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것이었다. 자기는 먹지도 않을걸 나를 위한답시고
이것저것 사서 준비하는데 때론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을 사 와서 골칫덩어리로 만들어 놓기도 한다.
언젠가는 아버님이 서울집에 잠깐 계실 때 족발을 사와서 내놓았는데
아버님이 틀니를 하고 계셔서 잘 드시질 못하는 것이었다.
나 역시 별로 기름기있는 것이나 껍질류는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서 그대로 남긴 적이 있다.
당신이나 다 먹으라고 핀잔을 주었더니 자기는 고기 같은 거 안 좋아한다고 발뺌을 하는 것이었다.
일본에 있는 한국사람들은 족발보고 환장한 듯이 게걸스럽게 먹는데
당신은 왜 안먹느냐고 오히려 내 탓을 하는 것이었다.
하여튼 매워서 도저히 날것으로는 먹을 수 없는 청양고추를 처리하느라고
우린 꽤나 신경을 썼다.
매운 맛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청양고추의 브랜드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지만
나는 너무 매운맛에 일부러 그 고추만은 피해 왔던 것이다.
몇 년 전에 백제의 옛 수도인 공주에 밭을 하나 사놓았는데
그곳을 부치는 분이 말린 고추를 한 포대 부쳐왔다.
토지임대료라고 하던가,./부치는 사례로 보내왔던 것이다.
평소에 고추가루를 별로 쓰지도 않을뿐더러 김치도 그때 그때 사서 먹는
우리로서는 큰 포대에 든 말린 고추를 어떻게 처리해야 될까 망설였다.
창고에 집어 넣었는데 그 빨간 고추를 볼 때마다 큰 아이가 태어난 때를 떠올리게 된다.
유럽에서 아기를 출산하려고 나보다 한 발 앞서 한국으로 돌아온 아내는 시골집에 잠시 머물렀다.
해맑은 햇살이 비추던 9월에 큰애는 태어났다.
병원에서 시골집으로 돌아오니 손자가 태어났다고 아버님이 대문에다가
빨간 고추와 숯을 새끼줄에다 매어달아 놓았던 것이다.
그때 그 고추가 너무도 인상적이어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늘을 향해
카메라를 돌리니 가을의 파아란 하늘과 빨간 고추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래서 빨간 고추를 볼 때마다 젊었을 때의 아내의 청순한 모습과
고추를 달고 태어난 큰 아이의 앙증맞은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서울로 가, 몇개월 지나지 않아서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큰아이는 동경이 고향이라고 생각하는것 같다.
지금 일본사람들의 밥상에는 김치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불과 십여년전만 해도 마늘냄새가 난다고 역겨워하던 일본사람들이
마늘과 고추의 효능을 알게 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 것이다.
고추의 원산지는 남미 아마존강 유역이며 1493년 콜럼버스가 스페인으로
가져가 유럽에 전파하였고 17세기경에 들어서 중국, 일본에 전파되었다고 한다.
고추가 가지고 있는 매운 맛 (캅사이신)은 영양이 많고 식욕과 더위와 추위에
견디는 힘을 증진시키는데 김치의 영양이 바로 고추의 캅사이신에 있다고 한다.
고춧가루로 제 맛을 내는 김치는 젖산 발효 식품으로
이 젖산의 작용으로 김치 맛이 산뜻해지며 인체에
해로운 병원균도 없어진다는 연구발표가 나오기도 했다.
다이어트에 가장 좋은게 김치인데, 김치의 주요 성분인 고추의 캅사이신이
체지방을 줄여 비만의 예방과 치료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일본의 매스컴에서 보도된 바에 의하면 한국 아가씨들이 김치를 많이 먹는데,
고추가 지방을 태워주어서 다들 날씬하다고들 한다.
또한 한국사람들이 피부가 좋은 것은 김치에 들어있는 마늘의 효과라고들 한다.
단것을 병적으로 좋아하는 일본인들의 식탁에 그들의 이른바 혐오식품의
대명사였던 김치가 당당하게 자리잡혔던 것은 김치가 그만큼 몸에 좋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고추의 비타민A는 호흡기 계통의 감염에 대한 저항력을
높이고 면역력을 증진시켜, 질병의 회복을 빠르게도 한다.
또한 어두운 곳에서도 밝은 눈을 지니게 해 준다.
고추에는 비타민 C가 사과의 무려 20배, 귤의 2~3배로 많이 함유되어 있는데 ,
한여름 더위에 지칠 때 먹는 풋고추 한두 개가 피로를 덜고 활력을 주는 이유이다.
그래서 옛부터 콩나물 국에 고춧가루 확 타서 마시면 감기가 낫는다고 했는데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예전부터 한국에 도착해서 공항에 들어서면 김치냄새가 난다고 아내는 말한다.
내 코는 냄새에 둔감하여서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김치냄새, 마늘냄새를 귀신같이 집어낸다.
빨간 고추를 바라보면서 , 작고하신 아버님이 대문에 매어놓으셨던 그 고추를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