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명당

世輝 2005. 5. 17. 18:17

 
명당자리

 

나는 장남이라서 오래전부터 묏자리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조부님의 산소는 한참을 헤매고 올라가야 하는 곳이라서 찾아뵙기도 힘들뿐더러 잔디가 자라지 않는 곳이기에 가깝고도 교통이 좋은  곳을 모친에게 상의했으나 그저 시큰둥한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선산이라는 곳도 산소자리는 벌써 일가친척이  다 써버려서 더 이상 쓸모 있는 곳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모친이 몇년전부터 산소 할 자리를 찾아다니시더니  이곳저곳 흥정을 하였는데 그다지 흡족하지는 않으셨나 보다.

 

3년 전인가 지인의 부탁으로 공주에 있는 땅을 하나 사게 되었는데 공주시 탄천면 삼각리라는 면소재지의 경치 좋은 곳인데  고속도로까지 생겨서 서울에서는 가까워지게 된 곳이다.

 

 모친을 모시고 가니 도통 맘에 들어하시질 않는 것이었다.  어스름이 깔려 어두워지고 비가 올 때라서 영 인상이 좋지 않으셨나보다.  아무래도 서울과 가까우니 우리야 좋지만, 고향에 묻히고 싶은 것은 여느 시골노인들과 다를바 없는 바람이었다.

 

내가 태어난 곳은 경북 상주시 화남면의 시골마을인데  이곳은 경상북도와 충청북도의 도경계선이 있는 하늘아래 첫 동네.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작은 냇가를 경계로 하여 경북과 충북道가 나뉘고 가는 학교가 다르고,  관공서가 달라지고 심지어는 억양까지 달라서 경상도 억양과 충청도 억양이 혼재하는 곳이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근처 충북 소재지로 이사를 갔는데 지금도 그 산골에서 이사 올  때  소를 탔던 기억이 아련하게 남아 있다. 

 

그곳은 집성촌이라서 전부 일가붙이고 하여 이사 간 뒤에도  방학 때  며칠 동안은 작은 집에 가서 놀기도 했다.

 

워낙 오지라서 전기와 문명의 혜택이 가장 늦었던 곳이기도  하여  아직도 마을 사람들의 순수함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충북 보은의 속리산 옆을 지나 상주 쪽으로 차로 십분 정도 가다 보면 구병산이라는 곳이 나오는데 산악인들에게는 그런대로  꽤나 알려진 100대 명산이다.  그 맞은편에 예전 화전민촌을 없애고 만든 서당골 자연농원이라는 이름의 천문대와  농장을 갖춰놓은 곳이 있는데 그 윗동네가 부친의 고향이기도 하다.

 

 도시의 고등학교 진학 후 도회지로 나가 살은 내게는 고향마을도 변하여 생소하기도  하지만 몇십 년 동안 발길을 끊었던 부친의 고향을 다시 찾게 된 것은  산소 문제 때문이기도 하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일 년 반전, 고향에 있는 친척에게서 연락이 와서 동네 뒤의 작은 밭을 사게 되었다. 모친은 흡족해하면서 이 땅을 샀다.  

 

그런데 부친이 작고하시기 몇 달 전에  좋은 땅이 나왔다고  연락이 왔다. 얼마 전에 산 밭 위 쪽에 위치한 몇 천평을 사게 되었다.

 

이번 모친의 기쁨은 저번에의 그 기쁨보다 더 큰 것 같았는데, 토지에  대한 집착감은 옛날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괞찮은 논만 나왔다고 하면 무리를 해서라도 사가지고 지금은  많은 농토를 소유하고 있는데 이제 그 욕심이 자기가  묻힐 산소자리로 옮겨가게 되었다.

 

부친이 묻혀 있는 그곳이 명당이라고들 모두들 치켜세우지만, 난 그런 것은 미신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이기 때문에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 

 

지금은 아예 중장비를 동원해서 산 반쪽을 싹 밀어버리고 끊임없이 뭔가를 구상하고 있는 모친에게는 두 손을 다 들어버렸다.  아예 증조부와 조부의 산소도 이번 윤달에 이장할 것이라고 하신다.

 

살아생전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해보신 분이라서 돈을 쌓아놓고도  쓰지 못하는 성격인데 그래도 모친이 원하는 대로 이나마 돈을 쓰니  여한이 없길 바라는 마음뿐이다.

 

항상 자식에게 남겨주지 말고 생전에 다 쓰고 돌아가시라는 내 말을  들은 척도 안 하다가 자식 중 한놈에게 모질게 당하면서도 또 내주는 그 부모 마음이 야속하기만 했다.

 

나는 명당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예전의 명망가와 왕족도 그 좋다는 명당을 다 찾아서 매장을 했지만 결국은 영화(榮華)를   이어가진 못하지 않았던가.

 

단지 양지바르고, 찾아가기 쉽고 조상이 대대로 살았던 곳이면  좋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 인간의 부질없는 집착과 욕심이 빚어낸  산물이 명당이라는 것이다.

 

서양의 매장 풍습처럼 평지에 비석하나 세워서 死者를 추모하고 기리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산은 온통 묘지로 뒤덮여 있고 나무를  베어내어 보기 흉한 모습이 되어있다. 조금 행세께나 하며 산다고  하는 집들의 묘지를 보면 참으로 으리으리하다.

 

차라리 살아계실 때 효도를 잘하면 될 것을 ,,,

산소 잘 쓰면 후손이 잘된다는 믿음에 이장을 하고 비석을 세우고 봉분을 높인다. 그러나 후손이 잘되고 못됨은 가르침과 본인의 노력여하에 따른 것이지  이승에 계신 선조들의 영향은 없다고 생각한다. 

 

요즘 몇 년 사이에 부쩍 화장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것 같다. 그러나 나는 고루하고 보수적인 사람이라 그런지 매장을 선호한다.  

 

 내가 일본에 오래 살았으면서도 그곳에 묻힐 생각이 없었던 것도  그 화장 습관 때문이다. 특별한 곳을 빼놓곤 토장이라고 하는 매장을  법으로 금지해 놔서 매장을 하려면 복잡한 수속을 거쳐서 매장을  허락하는 지방으로 가야 하던가 냉동시켜 한국으로 공수해야 한다.

 

 

어느새 중년이 되어 죽음을 생각하게 되는 자신이 서글퍼지기도 한다.

 

........ 2004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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